제로웨이스트 실천이 불가능한 공간들
제로웨이스트 실천은 왜 '어디서나' 가능한 게 아닐까?
제로웨이스트 실천이 하나의 생활방식으로 자리 잡으며 많은 사람들이 ‘플라스틱 제로’를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 일상 속에서 이 목표를 실현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특히 어떤 공간에서는 개인의 의지와 실천만으로는 플라스틱을 피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존재한다.
‘쓰레기를 줄이고 싶은 마음’과 ‘쓰레기를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공간의 현실’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깊다.
많은 사람들은 제로웨이스트 실천이 어려운 이유를 단지 ‘나의 게으름’이나 ‘소비 습관’ 탓으로 돌리곤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보다 훨씬 구조적인 문제에 가깝다.
예를 들어 어떤 공간에서는 재사용 가능한 용기를 들고 가도 그것을 받아주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곳은 기본적으로 포장이 없이는 제품을 구매할 수 없다.
즉, 플라스틱 제로가 불가능한 환경 자체가 우리 주변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플라스틱 제로 실천이 특히 어렵거나 불가능한 공간들을 짚어보면서,
그 한계의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제로웨이스트 운동이 보다 현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도 함께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제로웨이스트 실천은 혼자의 힘으로만 완성될 수 없다.
환경을 바꾸는 실천은, 환경 자체의 조건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병원, 학교, 어린이집 – 위생이 우선인 공간의 구조적 모순
병원, 학교, 어린이집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이용하게 되는 공공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간들은 공통적으로 ‘위생’을 최우선 가치로 삼기 때문에, 플라스틱과 일회용품 사용이 구조화되어 있다.
병원에서는 의료기구 대부분이 1회용이다.
주사기, 수액세트, 장갑, 체온계 커버, 플라스틱 컵 등 거의 모든 것이 감염 예방을 명목으로 일회용화되어 있으며,
이는 단순한 선택이 아닌 법적, 정책적 규제의 결과이기도 하다.
학교와 어린이집도 마찬가지다.
급식과 간식 제공 과정에서 일회용 비닐장갑, 랩, 스티로폼 도시락 용기, 플라스틱 수저 사용이 일상화되어 있고,
그 대안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더군다나 이 공간은 다수의 인원이 빠르게 먹고 치우는 시스템이 기본이기 때문에, 세척과 재사용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교육 기관에서 친환경 급식을 시도하고는 있지만,
아직 대부분의 시설은 비용, 위생, 인력 문제로 인해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위생’이 강조되는 공간에서는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 것이 곧 위생을 포기하는 일처럼 여겨지기 쉽고,
이는 제도적 한계로 굳어져 있다.
제로웨이스트 실천을 위해선 단지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안전한 재사용 시스템’에 대한 과학적 신뢰와 제도 개선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아무리 환경을 생각하는 이들이 있어도, 법과 구조가 허용하지 않으면 실천은 좌절된다.
이 모순을 직시하는 것이 ‘진짜 실천’을 위한 출발점이다.
카페, 편의점, 프랜차이즈 – 선택 불가능한 제로웨이스트 실천
현대인들의 일상 속 깊숙이 들어와 있는 카페, 편의점, 프랜차이즈 매장은
플라스틱 제로 실천이 가장 어려운 대표적인 공간이다.
이들은 ‘빠르고 간편한 소비’를 핵심 가치로 내세우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일회용 중심 시스템 위에서 운영되고 있다.
테이크아웃 음료에는 거의 예외 없이 플라스틱 컵과 뚜껑, 빨대가 제공되며,
샌드위치, 도시락, 컵라면, 과자류 등 편의점 식품 대부분은 이미 플라스틱 용기에 포장되어서 판매되고 있다.
카페, 편의점을 사용하지 않으면 될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급하게 나오느라 텀블러를 챙기지 못할 때나 빠르게 식사를 해결해야 할 때 등
현실적으로 바쁜 현대 사회에서 카페, 편의점을 사용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다회용 용기를 가져가도 이를 거부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프랜차이즈 매장 대부분은 본사 운영 매뉴얼에 따라 위생 문제, 고객 대응 문제,
브랜드 이미지 보호 등의 이유로 BYO(Bring Your Own) 용기 사용을 금지하거나 제한하고 있다.
법적으로는 허용되어 있어도, 직원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거나, 본사 방침이 일회용품 중심일 경우 실천은 거절당하기 쉽다.
그 결과 소비자는 선택지가 없는 구조에서 플라스틱 소비를 강요당하게 되는 셈이다.
게다가 요즘은 무인카페나 스마트 편의점처럼 인간의 개입이 최소화된 구조가 늘어나고 있어,
환경 요청이나 맞춤 서비스 제공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러한 구조는 제로웨이스트 실천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소비자의 ‘선택권’을 박탈하는 형태로 확산되고 있다.
결국 우리는 ‘포장을 거부할 수 없는 시스템’ 속에서, 불필요한 쓰레기를 생산자로서 떠안을 수밖에 없는 소비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선, 단순한 캠페인이나 친절한 요청이 아닌 시스템 전환의 요구가 필요하다.
제로웨이스트는 실천이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제로웨이스트는 개인이 참아내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설계해야 하는 구조적 선택지라는 것을.
제로웨이스트 실천이 불가능한 공간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개인이 게으르거나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 공간이 쓰레기를 만들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실천의 홍보보다도, 설계 방식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와 재구성이다.
실제 해결을 위한 흐름도 존재하고 있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다회용기 순환 시스템을 카페와 연계해 구축하고 있고,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의료 폐기물 중 일부 품목을 고온 소독 후 재사용하는 정책도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아직 전국적, 제도적 표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제로웨이스트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단순한 실천 독려가 아닌,
사용자-공간-정책이 연결된 거버넌스형 구조 제안이어야 한다.
또한 교육 역시 핵심이다.
‘포장 없는 소비는 불편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포장이 없도록 설계된 사회가 더 편리하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어릴 때부터 환경 교육과 생활 설계의 사고를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즉, 소비를 조절하는 개인보다, 구조를 설계하는 시민을 키우는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
제로웨이스트는 포기를 강요하는 운동이 아니다. 선택지를 늘리고, 더 나은 방향으로 공간을 설계하자는 사회적 제안이다.
플라스틱 제로가 불가능한 공간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 공간을 ‘비판하고 바꾸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